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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리우치 미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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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리우치 미쓰오는 1930년 야마나시현 출신으로, 후지 급행 창업자 가문에서 태어났다. 게이오기주쿠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하코네 등산 철도, 후지 급행을 거쳐 1962년 32세의 나이로 후지 급행 사장에 취임했다. 이후 후지큐 하이랜드 등 관광 사업을 확장하며 회사를 성장시켰다. 1976년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어 노동 대신, 통상산업 대신 등을 역임했고,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자유민주당 총무회장을 지냈다. 우정 민영화 법안 표결에서 반대표를 던져 자민당 공천을 받지 못했으나 무소속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2006년 자민당에 복당하여 2009년 정계에서 은퇴했으며, 2016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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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리우치 미쓰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미쓰오 호리우치 1997
공식 사진, 1997년 촬영
원어 이름堀内 光雄 (호리우치 미쓰오)
출생일1930년 1월 1일
출생지미사카, 야마나시현
사망일2016년 5월 16일
사망지도쿄도
정당자유민주당
학력게이오기주쿠 대학
웹사이트전 중의원 의원 堀内 光雄 (호리우치 미쓰오) (2016년 7월 17일 보관)
직책
통상산업대신재임 기간: 1997년 9월 11일 ~ 1998년 7월 30일
수상: 하시모토 류타로
전임: 사토 신지
후임: 요사노 가오루
노동대신재임 기간: 1989년 6월 3일 ~ 1989년 8월 10일
수상: 우노 소스케
전임: 니와 효스케
후임: 후쿠시마 조지
중의원 의원선거구: 야마나시현 전현구 (1993–1996), 야마나시현 제2구 (1996–2009)
임기: 1993년 7월 19일 ~ 2009년 7월 21일
전임: 복수 의원 선거구
후임: 사카구치 다케히로
중의원 의원선거구: 야마나시현 전현구
임기: 1976년 12월 11일 ~ 1990년 1월 24일
기타 경력
자유민주당 총무회장재임 기간: 2001년 4월 24일 ~ 2004년 9월 27일
총재: 고이즈미 준이치로
서훈
훈장정3위
훈1등 욱일대수장
기타중의원 영년 재직 의원 표창
경제학사 (게이오기주쿠 대학)

2. 생애

야마나시현히가시야쓰시로군미사카정(현 후에후키시) 출신이다. 후지 급행 창업자 일족 출신으로, 할아버지, 아버지 모두 중의원 의원이었다. 출생지는 당시 아버지 호리우치 가즈오가 관동군 참모로 부임했던 관동주뤼순이었다. 출생 당시가 정월 초하루여서 산파가 없어 옆집에 살던 이시하라 간지의 아내가 대신 아기를 받았다고 한다[3]. 아버지의 전근에 따라 펑톈, 신징, 안둥의 일본인 초등학교에 다녔다[3]. 쇼와 16년에 할아버지 료헤이의 간절한 요청으로 가족은 귀국했다. 아자부 중학교에 다니면서 신장병을 앓아 고향으로 돌아갔다[3]. 그 후 야마나시현립 고후 제일고등학교(중의원 의원 나카오 에이이치와 동창)에서 게이오기주쿠 대학 예과, 게이오기주쿠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학구적인 경영자로 알려져 있으며, 『생산성의 측정과 적정 분배』(1961년다이아몬드사 간행) 외 여러 저서가 있다.

대학 졸업 후, 후지산록 전기철도(현 후지 급행)에 입사하려 했지만, 아버지 호리우치 가즈오로부터 다른 회사를 경험하라는 말을 듣고, 하코네 등산 철도(현 오다큐 하코네)에 취직했다[3]. 그 후 후지 급행에 입사하여 도쿄도 내의 관광 버스 영업소에서 근무했다. 기획 과장, 경리 부장을 거쳐 자회사 엔슈 화물로 출향했다. 이러한 수련 체험이 훗날 동사를 관광 사업 중심으로 재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1962년, 32세의 나이로 후지 급행 사장에 취임했다.

현재의 후지 급행 버스의 컬러링(녹색을 베이스로 한 것)은 그가 고안한 것이다. 이 외에도 후지 급행 사장 시절에는 후지큐 하이랜드나 일본 랜드 등 관광 사업과 각종 사업에 주력했다. 아버지 호리우치 가즈오와 도큐 총수 고토 게이타와의 관계에서 도쿄 급행 전철의 방계로 간주되던 동사를 자립시키고, 일대에서 현재의 후지 급행 그룹을 형성, 사장 취임 후 10년 만에 영업 수입을 4배 이상으로 늘리는 등 재계 인사로서 명성을 떨쳤다.

1976년의 제3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첫 당선(당선 동기로는 아이치 가즈오, 나카무라 기시로, 하토야마 구니오, 나카지마 마모루, 니시다 쓰카사, 이케다 유키히코, 아이자와 히데유키, 쓰시마 유지, 시카노 미치히코, 쓰카하라 슌페이, 나카니시 게이스케, 요사노 가오루, 와타나베 히데오, 나카가와 히데나오, 아마리 아키라 등). 당선 후 오히라 마사요시가 이끄는 고치카이에 입회했다. 고치카이에서는 후임 회장 스즈키 젠코의 측근으로 알려졌다. 1980년에는 스즈키 젠코 내각에서 행정관리정무 차관으로, 1983년에는 제2차 나카소네 내각에서 총리부총무 부장관에 취임한 후, 1989년우노 내각에서 노동 대신으로 처음 입각했지만, 1990년의 제3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낙선했다. 그러나 1993년의 제4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곧바로 복귀하여, 1997년에 제2차 하시모토 개조 내각에서 통상산업대신에 취임했다. 통산상 재임 중 석유 공단에 대해 사무 측이 준비한 답변서 내용에 의문을 품고, 동 공단 관련 기업 112개사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독력으로 정밀 검토했다. 그 결과, 공단의 부실 채권이 1조 3,000억 엔까지 불어났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퇴임 후 1998년, 『분게이슌주』지 1998년 11월호에 게재된 논문 『통산성의 치부 석유 공단을 고발한다』에서 실태를 세상에 알렸다. 그 결과, 2002년에 "석유 공단 폐지법"이 성립되어, 동 공단은 2005년 3월을 기해 해산되었다.

2000년 11월의 가토의 난으로 가토파에서 분리되었다. 이듬해 호리우치파를 결성하여 회장이 되었다.

2001년 4월부터 2004년 9월까지 약 3년 반 동안 고이즈미정권 하에서 총무회장을 역임하며, 고이즈미 개혁에 반대하는 베테랑 의원이 많은 가운데, 기본적으로 일관되게 고이즈미를 지원했다. 2003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는 노나카 히로무고가 마코토 등으로부터 반고이즈미파의 통일 후보로 출마를 요청받았지만 고사했다. 그러나 총무회장 퇴임 후에는 돌연 반고이즈미 색을 분명히 했다. 이는, 파벌을 걸고 고이즈미 정권에 협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각 개조 등에서 호리우치파가 반주류파와 같은 냉대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정 민영화 법안의 중의원본회의 표결에서는, 표결 당일에 파벌 회장을 사임하고 반대표를 던졌다. 이 때문에 제4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자민당 공천을 받지 못하고, 무소속으로 출마. 자민당 공천의 나가사키 고타로 후보 등을 꺾고 10번째 당선을 했지만, 당선 후의 특별 국회에서는 재제출된 우정 법안에 돌연 찬성표를 던졌다.

2006년8월 22일에 게이오기주쿠 대학 OB 친목이라는 명목으로, 민주당 대표 오자와 이치로와 국민신당 대표 와타누키 민스케 (단, 두 사람 모두 전 자민당)과 골프를 치는 등 비자민 색을 강화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10월에 들어서면서 복당 흐름이 강해졌다.

11월 27일에는 자민당에 "복당원"과 "선서서"를 제출. 다음 날 28일에는 기자 회견을 열고 "맞이해 준다면 감사하다" "나는 법안에는 반대했지만, 민영화 자체에는 찬성"이라고 말하며 복당 이유 등을 국민에게 설명했다.

2006년 12월 4일, 반역 의원 11명의 복당이 당기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인정되어 자민당에 복귀. 12월 15일, 고가파에 명예 고문으로 재입회. 이듬해 9월 26일, 동 파 명예 회장에 취임했다.

2008년6월 16일에 자민당 본부는 호리우치를 공천하는 것을 내정했다[5]. 대립하는 나가사키 고타로에게는 비례 1위의 대우가 준비되었지만, 나가사키는 무소속으로 출마할 뜻을 표명, 아소총리가 중의원 해산・총선거 일정을 예고한 2009년7월 13일에 자민당에 탈당계를 제출, 17일에 승인되었다[6]. 7월 18일에는 나가사키를 지지하는 지역 정의 외 당원 3648명이 집단 탈당했다고 보도되었지만[7], 부풀려진 것이며, 자민당 야마나시현 연합회는, 실제 당원은 415명이며, 그 중에서도 고인의 경우나 본인의 승낙이 없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밝혔다[8]. 그 후 8월 11일, 나가사키가 보수계・반고이즈미・반우정 무소속의 정치인으로 구성되는 히라누마 그룹에 참가, 그룹 대표 히라누마 다케오가 요구했던 우정 민영화를 재검토하는 방침을 받아들임을 표명했기 때문에, 고이즈미 아이들의 자객으로 반고이즈미・반우정의 호리우치와 적대했던 지난 선거와 도식이 역전되었다[9].

2009년 8월 30일에 열린 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야마나시현 건설업 협회의 지원을 받아 선거 운동을 했지만[10], 민주당 신인 사카구치 다케히로에게 패배하여 은퇴했다. 2012년의 제4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장남의 아내 호리우치 노리코가 후계 후보로 출마, 소선거구에서는 나가사키에게 패했지만 비례 부활로 첫 당선했다.

2016년5월 17일, 간질성 폐렴으로 사망[2][11]. . 정부는 사후, 정삼위에 서하는 것을 각의 결정했다[12][13].

장례는 아오야마 묘지에서 호리우치 가문・자유민주당・후지 급행 주식회사 합동 장례 형식으로 거행되었다. 아베 신조 내각총리대신이 장례위원장을 맡고, 동 총리대신, 기시다 후미오 고치카이 회장, 고토 사이 야마나시현 지사(모두 당시)에 의해 조사가 보내졌다. 또한 아키히토 상왕, 다카마도 가문으로부터 조문 사자가 보내졌다[14].

2. 1. 초기 생애와 기업 활동

호리우치 미쓰오는 야마나시현히가시야쓰시로군미사카정(현 후에후키시) 출신으로, 후지 급행 창업자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중의원 의원을 지냈다. 출생지는 당시 아버지 호리우치 가즈오가 관동군 참모로 부임했던 관동주뤼순이었다. 출생 당시가 정월 초하루여서 산파가 없어 옆집에 살던 이시하라 간지의 아내가 대신 아기를 받았다고 한다[3]. 아버지의 전근에 따라 펑톈, 신징, 안둥의 일본인 초등학교에 다녔다[3]. 쇼와 16년에 할아버지 료헤이의 요청으로 가족은 일본으로 귀국했다. 아자부 중학교에 다니다가 신장병을 앓아 고향으로 돌아갔다[3]. 그 후 야마나시현립 고후 제일고등학교를 거쳐 게이오기주쿠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후지산록 전기철도(현 후지 급행)에 입사하려 했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하코네 등산 철도(현 오다큐 하코네)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3]. 이후 후지 급행으로 옮겨 도쿄도 내의 관광 버스 영업소에서 근무했다. 기획 과장, 경리 부장을 거쳐 자회사 엔슈 화물로 출향했다. 1962년, 32세의 나이로 후지 급행 사장에 취임했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그가 회사를 관광 사업 중심으로 재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후지 급행 사장 시절, 그는 후지큐 하이랜드와 일본 랜드 등 관광 사업을 중심으로 회사를 크게 성장시켰다. 현재 후지 급행 버스의 컬러링(녹색을 베이스로 한 것)은 그가 고안한 것이다. 그는 도쿄 급행 전철의 방계로 여겨지던 회사를 자립시키고, 10년 만에 영업 수입을 4배 이상으로 늘리는 등 경영 능력을 인정받았다. 저서로는 『생산성의 측정과 적정 분배』(1961년다이아몬드사 간행) 외 다수가 있다.

2. 2. 정치 입문 및 활동

호리우치 미쓰오는 야마나시현 히가시야쓰시로군 미사카정(현 후에후키시) 출신으로, 후지 급행 창업자 일족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중의원 의원을 지냈다. 출생지는 당시 아버지 호리우치 가즈오가 관동군 참모로 부임했던 관동주 뤼순이었다.[3] 아버지의 전근에 따라 펑톈, 신징, 안둥의 일본인 초등학교에 다녔다.[3] 아자부 중학교를 거쳐 야마나시현립 고후 제일고등학교 (나카오 에이이치와 동창)에서 게이오기주쿠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후지산록 전기철도(현 후지 급행)에 입사하려 했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하코네 등산 철도에 취직했다.[3] 이후 후지 급행에 입사하여 도쿄도 내의 관광 버스 영업소에서 근무했다. 1962년, 32세의 나이로 후지 급행 사장에 취임했다.

1976년 제3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첫 당선되어, 오히라 마사요시가 이끄는 고치카이에 입회했다. 스즈키 젠코의 측근으로, 1980년 스즈키 젠코 내각에서 행정관리정무 차관을, 1983년 제2차 나카소네 내각에서 총리부총무 부장관을 역임했다. 1989년 우노 내각에서 노동 대신으로 첫 입각했으나, 1990년 제3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낙선했다. 1993년 제4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복귀, 1997년 제2차 하시모토 개조 내각에서 통상산업대신에 취임했다.

2000년 11월 가토의 난으로 가토파에서 분리, 이듬해 호리우치파를 결성하여 회장이 되었다. 2001년부터 2004년까지 고이즈미 정권 하에서 총무회장을 역임하며, 고이즈미 개혁을 기본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총무회장 퇴임 후에는 반고이즈미 색을 분명히 했다.

우정 민영화 법안 중의원 본회의 표결에서 반대표를 던져 제4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 공천을 받지 못하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 후 특별 국회에서는 찬성표를 던졌다.

2006년 12월 4일, 자민당에 복귀하여 고가파에 명예 고문으로 재입회, 이듬해 명예 회장에 취임했다.

2009년 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 신인 사카구치 다케히로에게 패배하여 정계에서 은퇴했다.

2. 3. 자민당 총무회장과 고이즈미 정권

호리우치 미쓰오는 2001년 4월부터 2004년 9월까지 약 3년 반 동안 고이즈미 정권 하에서 총무회장을 역임했다.[2] 고이즈미 개혁에 반대하는 베테랑 의원이 많은 가운데, 기본적으로 일관되게 고이즈미를 지원했다.[2] 2003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는 노나카 히로무고가 마코토 등으로부터 반(反) 고이즈미 파의 통일 후보로 출마를 요청받았지만 고사했다.[2]

총무회장 퇴임 후에는 파벌을 걸고 고이즈미 정권에 협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각 개조 등에서 호리우치 파가 반주류파와 같은 냉대를 받았다는 이유로, 돌연 반(反) 고이즈미 색을 분명히 했다.[2] 우정 민영화 법안의 중의원 본회의 표결에서는 표결 당일에 파벌 회장을 사임하고 반대표를 던졌다.[2] 이 때문에 제4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자민당 공천을 받지 못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나가사키 고타로 후보 등을 꺾고 10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당선 후의 특별 국회에서는 재제출된 우정 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2]

2006년 8월 22일에는 게이오기주쿠 대학 OB 친목이라는 명목으로, 민주당 대표 오자와 이치로와 국민신당 대표 와타누키 다미스케골프를 치는 등 비자민 색을 강화하는 것으로 보였다.[2] 그러나 10월에 들어서면서 복당 흐름이 강해졌고, 11월 27일 자민당에 "복당원"과 "선서서"를 제출했다.[2] 다음 날 28일에는 기자 회견을 열고 "맞이해 준다면 감사하다" "나는 법안에는 반대했지만, 민영화 자체에는 찬성"이라고 말하며 복당 이유 등을 국민에게 설명했다.[2]

2006년 12월 4일, 반역 의원 11명의 복당이 당기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인정되어 자민당에 복귀했다.[2] 12월 15일에는 고가파에 명예 고문으로 재입회했고, 이듬해 9월 26일 동 파 명예 회장에 취임했다.[2]

2. 4. 우정 민영화 반대와 자민당 복당

호리우치 미쓰오는 2001년 4월부터 2004년 9월까지 약 3년 반 동안 고이즈미 정권 하에서 총무회장을 역임하며 고이즈미 개혁에 반대하는 베테랑 의원이 많은 가운데, 기본적으로 일관되게 고이즈미를 지원했다.[3] 2003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는 노나카 히로무고가 마코토 등으로부터 반고이즈미파의 통일 후보로 출마를 요청받았지만 고사했다.[3] 그러나 총무회장 퇴임 후에는 돌연 반고이즈미 색을 분명히 했다.[3] 이는 파벌을 걸고 고이즈미 정권에 협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각 개조 등에서 호리우치파가 반주류파와 같은 냉대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3]

우정 민영화 법안의 중의원본회의 표결에서는, 표결 당일에 파벌 회장을 사임하고 반대표를 던졌다.[3] 이 때문에 제4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자민당 공천을 받지 못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했다.[3] 자민당 공천의 나가사키 고타로 후보 등을 꺾고 10번째 당선을 했지만,[3] 당선 후의 특별 국회에서는 재제출된 우정 법안에 돌연 찬성표를 던졌다.[3]

2006년 8월 22일에 게이오기주쿠 대학 OB 친목이라는 명목으로, 민주당 대표 오자와 이치로와 국민신당 대표 와타누키 민스케 (단, 두 사람 모두 전 자민당)과 골프를 치는 등 비자민 색을 강화하는 것으로 보였다.[3] 그러나 10월에 들어서면서 복당 흐름이 강해졌다.[3] 11월 27일에는 자민당에 "복당원"과 "선서서"를 제출했다.[3] 다음 날 28일에는 기자 회견을 열고 "맞이해 준다면 감사하다" "나는 법안에는 반대했지만, 민영화 자체에는 찬성"이라고 말하며 복당 이유 등을 국민에게 설명했다.[3]

2006년 12월 4일, 반역 의원 11명의 복당이 당기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인정되어 자민당에 복귀했다.[3] 12월 15일, 고가파에 명예 고문으로 재입회했다.[3] 이듬해 9월 26일, 동 파 명예 회장에 취임했다.[3]

2008년 6월 16일에 자민당 본부는 호리우치를 공천하는 것을 내정했다.[5] 대립하는 나가사키 고타로에게는 비례 1위의 대우가 준비되었지만, 나가사키는 무소속으로 출마할 뜻을 표명했다.[6] 아소 총리가 중의원 해산・총선거 일정을 예고한 2009년 7월 13일에 자민당에 탈당계를 제출, 17일에 승인되었다.[6] 7월 18일에는 나가사키를 지지하는 지역 정의 외 당원 3648명이 집단 탈당했다고 보도되었지만,[7] 부풀려진 것이며, 자민당 야마나시현 연합회는, 실제 당원은 415명이며, 그 중에서도 고인의 경우나 본인의 승낙이 없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밝혔다.[8] 그 후 8월 11일, 나가사키가 보수계・반고이즈미・반우정 무소속의 정치인으로 구성되는 히라누마 그룹에 참가, 그룹 대표 히라누마 다케오가 요구했던 우정 민영화를 재검토하는 방침을 받아들임을 표명했기 때문에, 고이즈미 아이들의 자객으로 반고이즈미・반우정의 호리우치와 적대했던 지난 선거와 도식이 역전되었다.[9]

2. 5. 정계 은퇴와 사망

호리우치 미쓰오는 2009년 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 신인 사카구치 다케히로에게 패배하여 정계를 은퇴했다.[10] 야마나시현 건설업 협회의 지원을 받아 선거 운동을 했으나,[10] 낙선하였다. 이후 2012년 제4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장남의 아내 호리우치 노리코가 후계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6년 5월 17일, 호리우치 미쓰오는 간질성 폐렴으로 사망했다.[2][11] 향년 86세.[2] 정부는 사후 정삼위에 추서하기로 각의 결정했다.[12][13] 장례는 아오야마 묘지에서 호리우치 가문, 자유민주당, 후지 급행 주식회사 합동 장례 형식으로 거행되었으며, 아베 신조 당시 내각총리대신이 장례위원장을 맡았다.[14] 아키히토 상왕, 다카마도 가문으로부터 조문 사자가 파견되었다.[14]

3. 정책 및 성향

노다 세이코에 따르면 호리우치는 선택적 부부별성 제도 도입에 기본적으로 찬성한다.[15]

4. 평가 및 비판

자민당 총무회장 재직 일수는 역대 2위인 1251일(1위는 같은 宏池会의 스즈키 젠코)이다.[14] 아베 신조 전 내각총리의 추도사에 따르면, 미쓰오라는 이름에는 "다이아몬드나 용의 눈처럼 빛나는 인간으로 자라기를 바란다"는 소망이 담겨있다고 한다.[14] 그는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많은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 하나의 일을 완벽하게 해내라"는 말을 좋아했다.[16]

공공직업안정소를 "헬로 워크"라고 명명한 것은 당시 노동대신이었던 호리우치였다. 그는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찾기 위해, 부담 없이 들를 수 있는 장소"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설명했다.[14] 정계에서는 "경제의 호리우치"라고 불릴 정도로 경영자로서의 식견을 인정받았다.[14]

만주 시대에 넓은 얼음 위를 미끄러지는 롱 스케이팅의 즐거움을 알게 된 경험을 바탕으로, 후지큐 하이랜드의 전신이 되는 스케이트 링크를 조성했다.[17] 만화가 스기우라 사치오의 연재 작품 『코카키치 코라코』의 모델이기도 하다. 스기우라에 따르면 헤이카와 출판사에서 "컬리지 라이프 만화를"이라는 주문을 받았을 때 호리우치를 소개받아 교류가 시작되었다고 주니치 신문 석간의 연재 『이 길』에서 밝혔다. 스기우라는 "코카키치 군이 대의원이 된다니... 생각하면 왠지 즐거워지네요."라고 언급했다.

세이부 철도쓰쓰미 야스지로는 호리우치의 아버지 카즈오가 아들의 취업을 부탁했을 때, "자신의 회사를 잇게 할 거면 처음부터 자신의 곳에서 단련시키는 것이 최고다"라며 거절했다. 호리우치는 이 일화를 회상하며 쓰쓰미의 혜안에 감탄했다.[17] 호텔 마운트 후지를 건설하게 된 계기는 뉴욕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크라이슬러 빌딩에서 바라봤을 때 "높은 것을 높게 보이게 하려면 없어서는 안 된다"라고 느낀 경험 때문이라고 한다.[17]

북오프 코퍼레이션 창업자 사카모토 타카시는 29세에 시작한 오디오 숍의 경영난을 겪었을 때, 친척인 호리우치의 도움으로 빚을 청산할 수 있었다.[18][19] 그는 앙꼬 계열의 단 것을 매우 좋아하며, 앙팡 등을 즐겨 먹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6년 4월 중의원 지바 7구 보궐 선거에서 사이토 켄 후보 지원 연설에 나선 타케베 츠토무의 캐치프레이즈를 미야케 히사유키가 조롱했는데, 이 농담을 미야케에게 전수한 것은 호리우치였다.

앙꼬 계열의 단 것을 매우 좋아하며, 앙팡 등을 즐겨 먹는다. 담배는 매우 싫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1. 긍정적 평가

자민당 총무회장 재직 일수는 역대 2위인 1251일(1위는 같은 宏池会의 스즈키 젠코)이다.[14] 아베 신조 전 내각총리의 추도사에 따르면, 미쓰오라는 이름에는 "다이아몬드나 용의 눈처럼 빛나는 인간으로 자라기를 바란다"는 소망이 담겨있다고 한다.[14] 그는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많은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 하나의 일을 완벽하게 해내라"는 말을 좋아했다.[16]

공공직업안정소를 "헬로 워크"라고 명명한 것은 당시 노동대신이었던 호리우치였다. 그는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찾기 위해, 부담 없이 들를 수 있는 장소"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설명했다.[14] 정계에서는 "경제의 호리우치"라고 불릴 정도로 경영자로서의 식견을 인정받았다.[14]

만주 시대에 넓은 얼음 위를 미끄러지는 롱 스케이팅의 즐거움을 알게 된 경험을 바탕으로, 후지큐 하이랜드의 전신이 되는 스케이트 링크를 조성했다.[17] 만화가 스기우라 사치오의 연재 작품 『코카키치 코라코』의 모델이기도 하다. 스기우라에 따르면 헤이카와 출판사에서 "컬리지 라이프 만화를"이라는 주문을 받았을 때 호리우치를 소개받아 교류가 시작되었다고 주니치 신문 석간의 연재 『이 길』에서 밝혔다. 스기우라는 "코카키치 군이 대의원이 된다니... 생각하면 왠지 즐거워지네요."라고 언급했다.

세이부 철도쓰쓰미 야스지로는 호리우치의 아버지 카즈오가 아들의 취업을 부탁했을 때, "자신의 회사를 잇게 할 거면 처음부터 자신의 곳에서 단련시키는 것이 최고다"라며 거절했다. 호리우치는 이 일화를 회상하며 쓰쓰미의 혜안에 감탄했다.[17] 호텔 마운트 후지를 건설하게 된 계기는 뉴욕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크라이슬러 빌딩에서 바라봤을 때 "높은 것을 높게 보이게 하려면 없어서는 안 된다"라고 느낀 경험 때문이라고 한다.[17]

북오프 코퍼레이션 창업자 사카모토 타카시는 29세에 시작한 오디오 숍의 경영난을 겪었을 때, 친척인 호리우치의 도움으로 빚을 청산할 수 있었다.[18][19] 그는 앙꼬 계열의 단 것을 매우 좋아하며, 앙팡 등을 즐겨 먹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2. 비판적 평가

호리우치 미쓰오는 "다이아몬드나 용의 눈처럼 빛나는 인간으로 자라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이름 지어졌다.[14]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많은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 하나의 일을 완벽하게 해내라"는 말을 좋아한다.[16]

경영자로서의 식견과 "경제의 호리우치"라는 별명으로 정계에서 알려졌다.[14] 공공직업안정소를 "헬로 워크"로 명명한 것은 당시 노동대신이었던 호리우치이며,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찾기 위해, 부담 없이 들를 수 있는 장소"라는 의미를 담았다.[14]

만주에서 롱 스케이팅을 즐겼던 경험은 후지큐 하이랜드의 전신이 되는 스케이트 링크 조성에 영향을 주었다.[17] 호텔 마운트 후지 건설은 뉴욕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크라이슬러 빌딩에서 바라본 경험에서 비롯되었다.[17]

세이부 철도쓰쓰미 야스지로는 호리우치의 아버지 카즈오가 아들의 취업을 부탁했을 때, "자신의 회사를 잇게 할 거면 처음부터 자신의 곳에서 단련시키는 것이 최고다"라며 거절했다. 호리우치는 이 일화를 통해 쓰쓰미의 혜안을 느꼈다고 회고했다.[17]

북오프 코퍼레이션 창업자 사카모토 타카시는 경영난을 겪던 중 친척인 호리우치의 도움으로 빚을 청산할 수 있었다.[18][19]

2006년 4월 중의원 지바 7구 보궐 선거에서 사이토 켄 후보 지원 연설에 나선 타케베 츠토무의 캐치프레이즈를 미야케 히사유키가 조롱했는데, 이 농담을 미야케에게 전수한 것은 호리우치였다.

앙꼬 계열의 단 것을 매우 좋아하며, 앙팡 등을 즐겨 먹는다. 담배는 매우 싫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5. 소속 정당 및 파벌

호리우치 미쓰오는 신도정치연맹 국회의원 간담회 및 일본회의 국회의원 간담회에 소속되어 있다. 중부 횡단 자동차도 건설 추진 의원 연맹 회장, 리니어 중앙 신칸센 건설 촉진 의원 연맹 회장, 사법서사 제도 추진 의원 연맹 회장, 대심도 지하 이용 국회의원 연맹 회장, 의료 심리사 국가 자격 실현 국회의원 회 회장을 맡고 있다. 또한 한일의원연맹에도 소속되어 있다.

6. 가족 관계

세이와 겐지(세이와 겐지)(가이 겐지) 잇켄 씨 호리우치 가문의 적류이다. 미노부산 구온지의 기록에 따르면, 1282년(고안 5년) 9월 11일(음력), 병을 얻어 온천 치료를 위해 미노부산을 내려온 니치렌이 가미구로마의 호리우치 나가이에 숙박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니치렌 종과 관계가 깊어 호리우치 료헤이부터 현재 당주인 미쓰이치로까지 대대로 미노부산 구온지의 신도 총대를 맡고 있다.

선조는 가마쿠라 시대부터 대대로 가이 수호 다이묘인 다케다 씨를 섬겼으며, 다케다 신겐 밑에서는 사도노카미(호리우치 마사토시), 와카사노카미(호리우치 마사토요)를 역임했다. 가와나카지마에서의 전공을 칭찬받아 보도를 하사받았으며, 호리우치 마사토요는 산마이바시 성의 성장에 임명되었다. 보도와 갑옷, 진갓 등은 현재도 당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가이국지에도 호리우치 가문의 기록이 남아 있으며, 에도 시대에는 가미구로마 주변의 묘주를 맡았다고 쓰여 있다. 귀농한 호리우치 마사토요(호리우치 가문 18대, 초대 후지에몬)가 가미구로마로 이주해 온 나가무네와 같은 후지에몬을 칭하게 되었고, 이후 당주는 13대까지 대대로 "후지에몬"의 이름을 계승했다.


  • 증조부: 13대 호리우치 토우에몬(十三代目堀内藤右衞門)([가이국](가이국)[히가시야마시로군](히가시야마시로군), [쿠로코마 촌](쿠로코마 촌)의 명주·[고우시](고우시). 쿠로코마 촌[촌의원])
  • 조부: 호리우치 료헤이(富士急行) (후지 급행 창업자·중의원 의원)
  • 조부: 타나카 토사쿠[20](山梨県多額納税者) (야마나시현 고액 납세자, [야마나시 타나카 은행](야마나시 타나카 은행) 총재, 야마나시 증권 이사, 야마나시[현의원])
  • 큰아버지: 호리우치 소헤이 (해군 군인(대좌), 실업가. 장인은 [유노하타 번](유노하타 번) 13대 번주·나이토 마사야스)
  • 큰아버지: 호리우치 덴쥬(南米移民) (남미 이민, 실업가)
  • 아버지: 호리우치 카즈오 (후지 급행 사장·회장, 중의원 의원, 육군 소령)
  • 숙모: 호리우치 레이코 (중의원 의원·나카가와 시게하루의 딸. 숙부·호리우치 마사오의 아내)
  • 숙모: 호리우치 토쿠코 (아사쿠사 은행 총재, 중의원 의원이마이 키하치의 딸. 숙부·호리우치 요시오의 아내)[21]
  • 의형: 코바야시 마사키 (요코하마 변호사 협회 회장)[21]
  • 의형: 호리우치 케이조 (닛산 자동차 판매 주식회사 전무. 실업가·중의원 의원의 호리우치 케이지의 아들)[21]
  • 아내: 에이코 (구 육군 대좌이자 이시카와현의 정치가·쓰지 마사노부의 장녀)
  • 장남: 호리우치 코이치로 (현 후지 급행 사장)
  • 장남의 아내: 호리우치 쇼코 (도쿄 올림픽·패럴림픽 담당 대신, 백신 접종 추진 담당 대신, 중의원 의원)
  • 장녀의 남편: 후루야 나오키 (형 카츠히코는 마츠야 (백화점) 회장·창업가 6대 사장. 어머니는 후작·카잔인 치카이에의 딸, 치에코)


어머니의 친정인 다나카 가문은 야마나시현 가쓰누마정에 있던 구 야마나시 다나카 은행(현재는 박물관)의 두령 가문이었으며, 본인도 자주 놀러 갔다고 한다.

7. 기타


  • 자민당 총무회장의 재직 일수는 역대 2위인 1251일이다. (1위는 같은 宏池会의 스즈키 젠코)
  • 아베 신조 전 내각총리의 추도사에 따르면, 미쓰오의 이름은 "다이아몬드나 용의 눈처럼 빛나는 인간으로 자라기를 바란다"는 소망이 담겨 있다고 한다.[14]
  • 좋아하는 말은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많은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 하나의 일을 완벽하게 해내라"이다.[16]
  • 공공직업안정소를 "헬로 워크"라고 이름 붙인 것은 당시 노동대신이었던 호리우치이며,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찾기 위해, 부담 없이 들를 수 있는 장소"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한다.[14]
  • 경영자로서의 지견으로, 정계에서는 "경제의 호리우치"라고 불렸다.[14]
  • 만주 시대에 넓은 얼음 위를 미끄러지는 롱 스케이팅의 즐거움을 알고, 그 체험에서 후지큐 하이랜드의 전신이 되는 스케이트 링크를 조성했다고 한다.[17]
  • 만화가 스기우라 사치오의 연재 작품 『코카키치 코라코』의 모델은 호리우치이며, 스기우라에 따르면 헤이카와 출판사에서 "컬리지 라이프 만화를"이라는 주문을 받았을 때 호리우치를 소개받아 교류가 시작되었다고 주니치 신문 석간의 연재 『이 길』에서 말하고 있으며, 스기우라는 "코카키치 군이 대의원이 된다니... 생각하면 왠지 즐거워지네요."라고 코멘트하고 있다.
  • 취업에 있어서는 아버지 카즈오가 우선 다른 회사를 경험하게 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의원 관계에서 친교가 깊었던 세이부 철도쓰쓰미 야스지로에게 전화를 걸어 의뢰했더니, "자신의 회사를 잇게 할 거면 처음부터 자신의 곳에서 단련시키는 것이 최고다"라고 말하며 거절당했다고 한다. 호리우치는 "쓰쓰미 씨는 꽤 괜찮은 말을 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라고 술회하고 있다.[17]
  • 호텔 마운트 후지를 짓게 된 것은, 뉴욕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크라이슬러 빌딩에서 바라봤을 때 "높은 것을 높게 보이게 하려면 없어서는 안 된다"라고 느낀 경험에서라고 한다.[17]
  • 담배를 싫어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 2006년 4월 중의원지바 7구보궐 선거 당시, 후보자 사이토 겐의 지원 연설에 나선 다케베 쓰토무가 던진 "처음은 구, 사이토 켄"의 캐치프레이즈를 비꼬며, 미야케 히사유키가 "처음은 구, 타케베는 파"라고 조롱했지만, 이 농담을 미야케에게 전수한 것은 호리우치라고 한다. (단, 비슷한 농담은 마스조에 요이치나 고노이케 요시타다도 했다).
  • 북오프 코퍼레이션 창업자 사카모토 다카시는 29세에 시작한 오디오 숍의 경영이 기울었을 때, 친척에 해당하는 호리우치가 도움을 주어, 오디오 숍 부지를 시가의 1.5배인 2억 엔에 사들여 준 것으로 빚을 청산할 수 있었다고 한다.[18][19]
  • 앙꼬 계열의 단 것을 아주 좋아한다. 앙팡 등을 즐겨 먹는다.

참조

[1] 웹사이트 衆議院トップページ > 本会議・委員会等 > 本会議情報 > 議事経過 第162回国会(平成17年3月15日) https://www.shugiin.[...]
[2] 뉴스 堀内光雄氏が死去 http://www.sannichi.[...] 2016-05-17
[3] 논문 起業者列伝 前途洋々 富士急行社長 堀内光雄
[4] 문서 2021年設立の現行の富士山麓電気鉄道は別法人。
[5] 뉴스 堀内氏、2区公認に内定 自民・次期衆院選 3区は小野氏 党、長崎氏処遇は留保 http://www.47news.jp[...]
[6] 뉴스 自民・長崎氏が離党へ=山梨2区の非公認に反発 http://www.jiji.com/[...] 時事ドットコム 2009-07-13
[7] 뉴스 自民3648人集団離党…長崎衆院議員の支持者 https://web.archive.[...] Yomiuri Online 2009-07-18
[8] 뉴스 離党届「実際は415人」自民県連 長崎氏支持者を批判 https://web.archive.[...] Yomiuri Online 2009-07-23
[9] 웹사이트 https://web.archive.[...]
[10] 뉴스 2009년 8월 5일자 毎日新聞 지방판 毎日新聞 2009-08-05
[11] 뉴스 堀内光雄元通産相が死去 https://www.sankei.c[...] 2016-05-17
[12] 뉴스 故堀内光雄氏に正三位 http://www.jiji.com/[...] 時事通信
[13] 간행물 『官報』6795号 2016-06-14
[14] 웹사이트 総理のお言葉にお応えするべく全力で政治の道に取り組んでまいります https://genkihoriuch[...] 2016-06-02
[15] 웹사이트 野田聖子「政治が変わる、女性が変える」 http://www.noda-seik[...]
[16] 웹사이트 通商産業大臣 https://www.kantei.g[...] 2022-02-08
[17] 서적 君たちを生かす仕事 筑摩書房
[18] 웹사이트 ブックオフコーポレーション株式会社 https://v-tsushin.jp[...] ベンチャー通信WEB 2019-11-15
[19] 웹사이트 【ブックオフコーポレーション特集】“社長”を育て、書籍を中核にしたFCタウンづくりに乗り出す/ブックオフコーポレーションの21世紀戦略 http://kigyoka.com/n[...] 企業家倶楽部 2020-01-15
[20] 웹사이트 田中董策 (第8版) - 『人事興信録』データベース https://jahis.law.na[...] 2021-04-05
[21] 서적 豪閥―地方豪族のネットワーク 立風書房 2001-07-01
[22] 웹사이트 沼津城・三枚橋城 https://castlejp.web[...]
[23] 서적 甲陽重家録 株式会社西東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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